어른 옷을 입는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듯 젊은이의 옷을 입는다고 해서 젊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 나이와 그 나이가 가지는 본연의 모습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이른바 동안童顔이'최고'인 시대에 살고 있다. 노인들 중에도 이 트렌드에 휩쓸리는 사람이 많다. 타인에 의해 스스로를 규정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은 힘 있고 젊어 보여야만 사회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융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존재의 도착倒錯이다. 노년의 가치를 잊고 영원히 젊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도착에 빠지면 사람은 성숙할 수 없고 지혜의 샘은 메마른다. 그렇다고 해서 늙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연의 법칙을 끊임없이 거스를 뿐이다.
카티야겔린스키는2008년 11월 2일자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등> 신문에서 지난 10년간 미국에서 미용성형이 450퍼센트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2007년 한 해 동안 미국에서 미용 목적으로 의학시술을 받은 사람은 1억 1,700명이었다. 그중 남자 환자의 비율도 높아지는 추세다. 이러한 경향의 기저에는 외모의 경제학이라 부를 만한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옷을 젊게 입는다고 해서 젊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젊음의 노예로 사는 와중에도 노화는 계속된다.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은 오히려 늙는 것을 즐기는 데 있다. 늙지 않으려는 사람은 젊음을 쫓아다니다 보니 끊임없이 뒤처지지만 자기 나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활기로 충만하다. 그런데 활기야말로 젊음의 상징이 아닌가. 시편의 저자는 언제나 싱그럽고 열매 잘 맺는 나무를 가꾸는 노인을 칭찬한다. 젊음을 모방하는 노년이 아니라 명상을 하고, 침묵과 명상을 위해 시간을 내는 노년은 활기로 넘친다. 깨어있는 자세로 조용히 세상 돌아가는 일을 관조하며, 진정 해야 할 말을 한다. 무엇인가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 않고 세상사에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자유 속에서 내적 젊음과 활기를 유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