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1주간 월요일/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송영진 모세 신부
<연중 제31주간 월요일>(2018. 11. 5. 월)(루카 14,12-14)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어야 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
즉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루카 6,32-33).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일입니다(루카 6,34).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2,31).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대답하셨습니다(마태 18,21-22).
이 말씀은 한계를 정하지 말고 용서하라는 가르침인데,
‘용서’를 ‘사랑’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라고 말하지 않고,
아무리 많이 해도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14).”
‘점심이나 저녁 식사’는 일상적인 식사가 아니라 ‘큰 잔치’이고(13절),
여기서는 ‘사랑 실천’을 뜻합니다.
‘친구,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들을 부르지 마라.” 라는 말씀은 “그들‘만’ 부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랑 실천은 자기가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 즉 가족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친구, 형제, 친척에게도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더 멀리, 더 많은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확산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만 부르면 안 되는 것은 보답을 받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들이 보답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보답을 받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보답을 받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문제가 됩니다.
그런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보답을 안 받으면 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처음부터 배제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 초대하는 것 자체가
이미 보답을 받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 실천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냥 무조건 베푸는 일입니다.
따라서 대가를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나 줄 수 없는 사람들에게나
똑같은 사랑을 실천해야 진짜 사랑 실천이 됩니다.
여기서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은
소외계층 사람들을 뜻합니다.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소외계층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를 기준으로 해서 내가 멀리했던 사람들, 나하고 친하지 않았던 사람들,
나보다 못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킵니다.)
여기서 “그들을 초대하여라.” 라는 말씀은 “그들‘만’ 초대하여라.”가 아니고,
“그들‘도’ 초대하여라.”입니다.
‘잔치’에서는 아무도 차별대우를 받으면 안 되고, 역차별도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대접을 받아야 하고, 모두가 함께 어울려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런 곳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고, 학대받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히브 13,1-3).”
여기서 ‘손님’으로 번역되어 있는 말은 ‘나그네’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나그네’는 의지할 곳 없는 뜨내기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나그네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말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외롭고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들,
즉 ‘작은 이들’을 잘 보살펴 주라는 뜻입니다.
어떤 이들은 나그네 접대를 하다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했다는 말은,
‘작은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당신에게 해 준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습니다(마태 25,40).
초대에 관한 말씀과 ‘작은 이들’에 관한 말씀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라는 계명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나하고 친하든지 친하지 않든지,
나를 사랑하든지 사랑하지 않든지 간에
모든 이웃은 곧 ‘나 자신’이고, 예수님입니다.
(이웃 사랑 실천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이고, 나의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씀은,
“그들은 너에게 보답할 수 없어도,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너는 행복하다.”로 번역을 바꿔야 합니다.
(여기서 ‘행복하다.’는, ‘복되다.’, 즉 ‘하느님의 축복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보답할 수 없는 것이 행복의 원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대신 보답해 주시는 것이 행복의 원인입니다.
보답 받기를 바라지 않고,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의 복’을 받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사람에게서 복을 받기를 바라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복을 받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 말하고 있는 ‘하느님의 복’은,
지상의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이 아니라, 내세의 영원한 행복을 뜻합니다.
신앙생활은 세속의 눈으로 보면 물질적으로 손해만 보는 생활로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또는 하느님 나라에서는 큰 이익을 얻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 한 잔’ 같은 작은 선행도 결코 잊지 않고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르 9,41).
- 송영진
모세 신부 -
오늘을 위한 기도/김소엽 작사,
장욱조 작곡/바리톤 유성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