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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와 용서 - 송봉모 신부

sunog 체칠리아 2016. 6. 9. 23:45





상처와 용서 - 송봉모 신부

구약에서 여성이 남성을 사랑한 사례는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였다고 서술하고 있고, 이 둘은 다윗이 사울의 시기심에 의하여 죽을 고비에서, 미갈의 밀통과  피신처를 알선, 다윗의 생명 구해 주었고 결국은 다윗은 왕이 되고 미갈은 왕비가 됩니다.

 이 둘의 사랑이 사소한 문제로 파경을 맞이하는데, 다윗이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빼앗겼던 하느님의 계약 궤를 찾아 예루살렘에 오게 되자 너무 기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것이고.

 성곽위에서 다윗의 춤을 바라다본 미갈은 “꼭 건달꾼들 같이 몸을 온통 드러내시고 춤을 추시다니 임금으로서 체통이 말이 아니더군요.” 하며 빈정거렸는데, 다윗은 하느님 때문에 기뻐하는 날, 같이 기쁨을 나누지는 못 할망정 남편을 무시한 태도에 노여움을 불러일으켰지요.

 다윗은 미갈에게 가장 아픈 말을 주었으니 “하느님께서 그대 아버지와 집안을 벌하고, 왕위도 핏줄을 제쳐두고 나를 택하시어 왕으로 세우셨소. 나는 그 하느님 앞에서 춤을 출 것이며 더 경망히 굴 것이오.”

다윗의 이 독설은 미갈의 비난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 같이 보이나 미갈 에게는 자기 아버지와 세 오빠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적군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고, 집안이 망한 이야기이니  한(恨이) 되는 가장 아픈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이지요.

물론 이 후로는 다윗과 미갈은 더 이상 예전의 부부로서의 애정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고 했으니 얼마나 부부 싸움이 엉뚱한 곳에서, 순간적으로 내뱉은 말 한마디로 시작하여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소한 문제가 크게 감정을 상하게 하였네요.

    본 론

  “우리가 계속 가질 수 있는 행복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면서 사랑하는 것뿐이다." (로맹 를랑)

  A 용서에 대해서

1. 용서, 세상에서 제일로 하기 어려운 것

세상에서 하기 어려운 두 가지, 죄 안 짓는 것과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랍니다.

죄 안 짓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은 용서한다는 것이고, 우리는 체험을 통하여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사소한 잘못을 내게 범한 사람을 용서하려 해도 “나”란 자아를 버리기 전에는 어렵고, 하물며 내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원수가 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이 어렵답니다.

용서가 쉽지 않다고 달마 스님은 “마음, 마음, 마음이여, 참으로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으니.” 하고서 용서 못한다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 옹졸해졌다는 것이랍니다.

우리가 용서하기 어려운 상대는 한때 얼마나 나와 다정한 사이였던가? 상처는 친밀감을 먹고산다고, 한때 다정했던 사람, 깊이 신뢰했던 사람이 내게 상처를 주기에 이제는 바늘 하나 조차 꽂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오그라든 것이지요.

2.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길

가. 용서하지 않으면 내 몸이 견디지 못하기에, 내가 살아남기 위해.

 용서는 자신을 위한 것이니 상대가 뉘우쳤기에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스스로가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분노, 화, 적개심 때문에 용서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부정적인 감정들이 우리 가슴 안에 가득 차게 되면, 무엇보다 몸이 견디지 못하니, 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해지고, 심장이 아프고, 소화가 안 되고, 잠을 잘 수 없고, 안절부절 해지고, 이런 독소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화병, 울화병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화를 많이 내면 심장에 안 좋으며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은 심장병에 걸린 확률이 두 배나 높다는 연구 결과를 보더라도, 내가 상처받은 것도 억울한데, 이제는 화병에 걸려 심장마비나 암에 걸린다면 얼마나 억울한가? 나만 화병에 걸려 일찍 죽는다면......

나를 아프게 하고 내게 상처를 준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 잘못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기가 용서를 청해야 한다는 사실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며, 심지어 모른 채 죽는 경우도 있으니, 우리가 용서를 베푸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에,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니까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나. 다른 이들로부터 피곤한 사람으로 찍히지 않기 위해서 이다.

가장 함께 지내기 어려운 사람이 늘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라는데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은 전염성이 강하여 한 사람이 우울하면 옆 사람도 마음이 어둡고, 화내는 사람의 주변에서는 그 화를 같이 먹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도 내가 늘 남을 원망하고 화를 낸다면, 내 말을 들어주고 헤아려주는 횟수가 점점 적어진다는 것이지요. 왜냐면 화를 내는 나를 보면 피곤이 쌓이고 자신에게 분노와 적개심이 옮아지는 것이 두려워 피하게 되고 멀어진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40대 직장인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불구가 되는 경우에 ‘왜 잘나가는 내가 하필 이런 사고를 당하여 이 불행을 겪어야 하냐고’ 원망하고 화만 내고 푸념만 늘어놓으면 가득이나 살기 어려운 판에 그 배우자는 온갖 독설을 참아내기 어려워 결국 화병에 걸리고 맙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생기는 문제는 상처 난 마음을 아물게 하기 보다는 그 상처를 키우면서, 마치 꽃에 물을 주듯이 미움과 증오심의 물을 주고 살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내 마음속을 다 차지하게 되니, 내 삶과 인생의 즐거움은 어디로 갔냐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짧고 귀한 시간을 미운 사람이 차지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면 벗들에게나 가족들에게서 피곤한 사람, 편안하지 못한 사람, 늘 불만에 차있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낙인 찍혀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용서해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 용서하기 위해서

가. 용서는 절로 되는 것이 아니니, 먼저 결심하고  신앙의 도움이 필요하다.       

용서는 용서하기 위하여 결심을 내리는 순간부터 용서의 시작이지만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은 인간적인 마음으로 불가능해도 각자가 믿는 종교적 행위 안에서 결심하면 가능한 것이 또 하느님에게 원수를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용서하겠다는 결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주는 사례는 영화 빠삐옹인데, 주인공 앙리(스티브 맥퀸)는 목숨을 걸고 탈출을 반복 시도하는 이유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앙리가 스무 살이던 해, 빠리 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근처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실적에 눈이 멀었던 검사에 의하여 무고하게 살인죄로 체포되고, 검사는 거짓 증인을 내세워 유죄판결을 내린지요.

앙리는 자기 신세를 망친 검사에게 복수하고자 아홉 번 탈출을 시도했고 14년이 지난 1944년 악마의 섬에서 탈출하여 남미 곳곳을 전전하면서 갖은 일을 하여 돈을 모았습니다.

프랑스 형법상 30년이 지나면 범죄시효가 만료되는데, 30년이 지난  해에 그 검사를 죽이기 위하여 빠리에서 자기가 젊었을 때 다녔던 거리, 부모님과 함께 살던 거리, 친구들과 담소하던 장소를 거닐면서, 특히 살인범으로 누명을 쓰고 체포당했던  그 거리에서 점차 심경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이제 와서 원수를 찾아서 어쩌자는 것인가?’ ‘설혹 그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어 그를 죽인다 한들 지금 와서 내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가?’ ‘인생은 허무한 것 아닌가?’ 는 생각과 가슴에 치미는 무엇이 있더란 것입니다.

“하느님, 제가 복수를 포기하는 대가로 다시는 저와 같은 비극적 사건이 생기지 않게 해 주소서.” 고 생각을 바꾸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신에게는 “너는 이겼다. 앙리, 너는 자유롭고 사랑받는 네 미래의 주인공으로 여기 서 있다. 너의 원수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더 알려고 하지 말라. 그들은 과거의 한 부분일 뿐이다. 너는 여기에서 이 비극적 일에 관계된 사람 중에 가장 행복한 자인 것을.” 앙리는 복수하러 간 그곳에서 복수심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것이고, 37년 동안 자기  라는 감옥에서 갇혀 있다가 용서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나. 용서하기 위해서는 상처에서 치유되느냐 안 되느냐의 열쇠는 바로 나에게 있다.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이 나를 치유하고 아물게 한다고 생각한다면 평생 상처에서 헤어날 수 없으니, 내 안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과 자신이 믿는 하느님뿐이라는 것이지요.

내가 신의 도움을 받아 일어서는 것이다. 상대가 변화되어야만 내
상처가 낫는다고 생각하거나, 현실이 바뀌어야만 내 상처가 낫는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어려서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언제까지나 부모에게 탓을 돌리며 살수는 없지요. 세상에 어느 부모가 처음부터 고의적으로 자녀에게 잘못된 그림을 그려주고자 했을까?

어느 남녀가 결혼하면서 ‘매일 두들겨 팰 만한 아이를 하나 낳아 기릅시다.’ 하고 말하겠는 가요? 무관심한 부모도, 엄격한 부모도 다 마찬가지로 자녀에 대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왔을 뿐이지요.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해 분노하고, 자기의 운명을 탓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해야 될 책임은 나에게 있다. 노력함이 없이 상처에 갇혀 비참하게 生을 보내는 것은 내 책임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다거나 다른 직업을 가졌다면 더 좋은 생활을 했을 것이라 하지만 나의 근본 태도가 더 나은 환경에 의해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외부세계를 변화시킴으로서 태도가 바뀌리라는 것은 환상이요 착오라는 것은 늘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나쁜 습관이 일순간에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펜을 바꾼다고 내 글씨체가 바뀌어 지는 것이 아니듯이 새 직업, 새 집, 새 배우자를 갖는다 해도 나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아니랍니다.

“기쁜 소식은 이것이다. 당신의 태도만 바뀐다면 나쁜 소식이 기쁜 소식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제비꽃을 밟으면, 제비꽃은 우리 발뒤꿈치에 좋은 향기를 남겨준다. 용서라고 말하는 것은 그 향기를 말하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

※사소한 상처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지금까지 언급한 상처는‘진짜 상처‘입니다.

진짜 상처와 사소한 상처는 구분되어야 하는데, 진짜 상처의 경우, 우리는 미움의 악순환이란 운동장에서 해방되어야 하지만, 사소한 상처의 경우, 우리는 그러한 상처를 자초한 자신의 미성숙한 태도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진짜로 상처를 받은 경우, 용서해야 될 대상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상대방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사소한 상처를 가졌다면 우리가 용서해야 될 대상은 상대방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지요. 사소한 상처 앞에서 자신과 화해하고 스스로 홀로 서서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사소한 상처에서 헤어나려면 기대하지 마라.

상대가 나의 엄마가 되어서 나에게 엄마처럼 헤아려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버리라는 것이지요. 기대한다는 것은 곧 실망하고 상처받겠다고 하는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기대는 안개와 같은 것이어서 만져지지 않기에 우리를 속이고 헤매게 만들고 우리 마음을 멍들게 만들며 서로의 관계를 파괴시키지요.

이 세상 그 누구도 기대할 수 없으니, 자녀에게 조차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바랄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대가 아니라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자녀에게 부모는 현실적인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엇이 되어 주기를 요구하는데, 피를 싫어하는 자녀에게 의사가 되라고 한다든지, 손가락이 짧은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친다면 재능과는 동떨어진 강요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재능에 따라 선택하게 해야 자녀의 生이 완성되고 善이 자라기를 원하는 순수한 바람이라는 것이랍니다.

자식이든, 친지든, 친구이든 그 누군가에게 기대하며 산다면 상처를 쉽게 받는다는 것이니, 우리가 일상 안에서 얼마나 쉽게 배신감이나 섭섭함을 느끼면서 상처를 받는지!

평상시에나 명절 때 내가 기대하는 상대에게서 연락이 없거나 챙겨주지 않을 때는 우리는 꿍한 마음을 먹게 되고 섭섭함을 가지면서, 그 상대에게 내가 베푼 은덕을 헤아리면서 만나면 자연이 상대에게 명령조로 말하거나 불쾌한 어조로 말하게 되니까 자신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상처만 생기게 되니, 상대가 미리 알아서 나를 돌보아 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무리한 바램이지요.

많은 여성들이 결혼기념일이 가까워오면 남편에게 기대감으로 설레다가 카드하나, 꽃다발하나도 없으면 그 좋은 날 여성은 상처를 받지요. 결혼기념일을 헤아려 미리 달력이나 일정표에 표시하여 알릴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을 상대에게 분명히 표현하는 것은, 상대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사람임을 믿기에, 솔직하게 도와 달라 청하자는 것입니다. 서로가 open하면 설혹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타당한 이유에 이해하고 만다는 것이지요.

※사소한 상처에서 헤어나려면 추측하지 말라.

흔히 사람들은 내 마음대로 추측하면서 상대를 난도질하는데, 특히 예민한 사람은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서 아는 척 하지 않거나, 평소와 달리 서둘러 인사하면서 지나면 마음이 어두워지면서 상대가 자기를 무시하거나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상처를 입는다는 것입니다.

별 것 아닌 것 같고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고 있다고 간주하여 더 깊은 어둠속에서 헤매게 되니 모두에게 거부당하고, 배신당하고 있다고 추측하면서 괴로워합니다.

어느 여인이 자녀들 앞에서 남편을 저 세상에 먼저 보내게 되는데, 장례 때에 자녀들 앞에서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답니다.  그런 엄마를 본 사춘기 딸은 혼자서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지 않았다.’ 라고 단정하고 엄마가 다른 남자를 사귀고 있다고 까지 생각하여 엄마를 미워하고 매사 반항적이었다고 합니다.

사실은 엄마는 남편을 보내고 혼자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아이들 앞에서 의연하게, 강하게 보이는 것은 물론 아빠는 천국에 갔으니 죽음은 슬픔이 아니고 새로운 삶이라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였던 것이나, 딸은 엉뚱하게도 엄마를 그런 식으로 추측하여 단죄한 것이지요.

개와 고양이의 앙숙 관계도 서로 감정의 표현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초래되는데, 개는 기분이 좋을 때 꼬리를 치켜들고 살랑살랑 흔들다가 기분이 언짢아지면 꼬리를 축 늘어트리잖아요?

한편 고양이는 기분이 좋을 때는 꼬리가 축 처지고 성이나면 꼬리가 하늘로 솟구치니, 만나면 감정 표현이 다른 놈이니 싸울 수밖에 없지요.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른 이들을 오해하면서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상처받는지! 서로 상대를 오해하는 경우, 두 사람 사이의 행동 양식이나 인지 구조가 서로 다르거나 시간차가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상황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행동할 뿐이지 누가 옳고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상대의 생각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치 않고 내 입장에서만 추측한다면 그것은 내가 자초한 사소한 상처인 것이지요. 이러한 경우, 용서는 나와 상대가 서로의 행동양식이나 경험한 환경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데서 이루어진답니다.

인디안 속담에 “어떤 사람의 행동 양식과 인지 구조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걸어 보아야 한다.” 남의 신을 신고서 1마일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자신의 가치기준, 행동양식과 상대의 그것과 확연히 다른 이유를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웨인 다이어가 말하기를, “그동안 내가 봐왔던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분석,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다.”

※ 사소한 상처로 인해서 헤매지 않으려면, 지금 당신 안에 있는 상처의 터 밭을 제거하라.

 “나는 완벽해야 한다.” “나는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된다.” “내 사전에는 2등은 없다. 1등만 있다. ‘ 등등의 태도들은 다 상처를 낳는 터 밭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내 안에 상처받을 소지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편적으로 모두가 가지고 있는 상처의 터 밭은 “나는 인정받아야만 한다,”  “나는 사랑받아야만 한다.” 는 고정기대감을 고집하는 우월감을 지닌 왕자병, 공주병에 젖어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남들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사람은, 주위에서 그에게 충분히 주목하지 않을 때, 그에게 반대할 때, 이해해주지 않을 때 상처를 받게 되고, 오히려 상대에게 자기 가치를 입증시키려고 기를 쓰고 노력하면서 스스로는 더 많은 상처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남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스스로에게 “만일 그들이 나를 인정하면, 그 때문에 내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인가?”고 질문해 보면 대답은 ‘다른 사람의 인정은 내 자신의 가치와는 무관하다.’ 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내가 이 사람에게 나를 입증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나를 존경할 것인가? 그가 인정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일 아닌가?” 이런 질문을 해 보고, “그래 이번에는 나의 가치를 입증하려 애쓰지 말고 그가 좋을 때로 생각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랍니다.

우리가  모임에서 어떤 의견을 내든 어떤 모습을 보이든 나를 반대하는 사람은 60% 정도는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보편적 원리) 그로 인하여 거부받기 때문에 감정적 혼란을 느끼거나 상처받을 이유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링컨은 “나를 공격하는 모든 말에 답할 수 있을 만큼 책을 읽는다 해도 나에 대한 공격은 여전히 있을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하면서 내 방식대로 밀고 나갈 뿐이다. 만일 그 결과가 훌륭하면 비난하는 말들은 무익해질 것이고, 나쁘면 수많은 천사가 나의 정당성을 증언해 준다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고 말했답니다.

  우리 자신의 사소한 상처를 보면 반드시 터 밭이 있고, 그 때문에 늘 같은 상처를 받으면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결국 거기에 길들여져 헤어나기 어렵다는 것인데, 마치 소년시절에 각인된 고정관념이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는 이치와 같은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통상 우리가 받는 상처는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존 포웰을 “어느 누구도 우리 감정의 직접적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다만 우리의 감정을 조금 건드릴 뿐이다.” 고 했는데, 내가 어떤 상황에서 심란하게 반응하는데 다른 사람은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내가 갖는 심란함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내 상처의 터 밭에 있음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원인이 되는 상처의 터 밭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소한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준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자기 존중감이 없는 이들은 쉽게 자신을 비하(卑下)하고 단죄하며, 스스로 무가치한 존재, 실패한 인물로 간주해 버리기에 쉽게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랍니다.

“안 돼,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정말 어쩔 수가 없다니까. 뭐든지 되는 일이 없어.” “누구에게나 사랑받지 못할 거야.” 이같이 부정적이고 자기 비하적인 말을 너무도 쉽게, 습관처럼 내뱉는다면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한다는 것이지요.

우리 인간을 이 세상에 내어놓으실 때 하느님은 무가치한 존재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가장 가치 있는 존재로 내어 놓으셨는데, 우리가 스스로 무가치한 존재로 대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랍니다.

자신을 재주가 없다, 머리가 나쁘다, 우유부단하다, 눈치가 없다, 소심한 인간이라 생각한다면 스스로 반사회적인 인간상을 뒤집어쓰는 셈이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반-사회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지요.

한 젊은이가 실력은 있건만 면접에서 번번이 탈락하여, 우울감에 빠진 그는 심리상담가를 찾아가게 되었는데, 그 상담자는 이 젊은이가 낮은 자존심으로 인하여 제 실력을 다 드러내지 못함을 지적했는데, 그는 자기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회사가 면접에 불러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어 면접관 앞에서 선처를 바라는 자세를 갖게 되니 면접관 눈에는 자신 없고 부족한 사람으로 인식되게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내가 나 스스로 승리자로 여기면 다른 사람도 나를 승리자로 생각하게 되지만, 내가 나를 구제불능으로 여기면 남의 눈에도 희망이 전혀 없는 존재로 보일 것이다. 내가 나를 인정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나를 인정할 뿐이다.”

악마는 여러 가지 무기를 써서 우리의 영혼을 파괴시키는데, 그 무기들은 인간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분노와 악심, 걱정과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하여 자기를 비하시키게 만드는 것들인데, 이 중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자기 스스로 비하하고 단죄하도록 만드는 것이랍니다.

어떻게 자긍심을 높일 수 있을까?

그것은 내 인생을 내가 소중히 여기겠다고 결심하면서부터 자긍심은 높아지는 것이니, 나 자신을 돌보는 작업을 하겠다고 결심하면서부터 자기 존중감은 고양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누가 보아주지도 않지만 옷을 매일 갈아입는다든지, 수염을 밀고 식사 후 양치를 하며, 구두도 광나게 닦고, 운동을 매일 하여 건강한 몸매를 유지하는 등 오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인생을 소중하게 돌보기 위하여 노력하라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자신에게 상냥하게 대해주고 관대함을 베풀어주어야 하는데, 자기가 생각해도 못나 보이는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용서해 주고 격려해 주어야 하는데, 자기 이름을 부르며 “괜찮아, 너는 항상 이렇지는 않아, 다음부터는 더 잘 할 수 있어.” 하면서 새로운 의식을 스스로 주입시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신을 존중하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되풀이 훈련을 쌓을 필요가 있으니,  타자를 잘 치려면 매일 타자 연습을 해야 하고, 골프를 잘 치려면 매일 골프 연습을 해야 하듯이 자신을 돌보고 자기를 실현하고 싶다면 자신을 돌보는 단련을 매일같이 해야 한다. 자신을 용서하라.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위 하지 못했을 때는 다시금 노력하기 위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웨인 다이어의 ‘타고난 내 운명을 바꾼다.’ 54쪽)

자기 사랑의 방법 중에 구체적으로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음식 값이 비싸더라도 주문해서 먹고, 식사 후 피로하면 아무리 일이 있다 해도 쉼의 시간을 가져, 산책하거나 잠시 낮잠을 자고, 그러면 몸과 마음이 한결 상쾌한 상태로 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업보의 원리로 살아가며, 자기를 섬세하게 느낄 줄 아는 사람이니, 아무리 나쁜 상황이라도 좋은 결정을 내리고, 밀려오는 중압감이 커도 긴장에 대면해서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삶을 문제로 대하기보다  신비로 대하는데, 삶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이며, 하나는 삶을 문제로 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비로 대하는 것인데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후자입니다.

삶을 문제로 대하면 우리는 그 문제를 설명해야 하고 바로 잡아야 하지만 삶이란 경이의 세계를 고정관념으로 한 면에 치우쳐서 문제로만 본다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지요.

스스로 근시안적인 시각에서 문제들만을 바라보고 그것들을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가운데 귀한 인생 대부분을 습관적으로 탕진한다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삶을 신비로 본다면 우리는 우리 한계를 넘어서는 영원의 세계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 세계로부터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 사소한 상처를 갖지 않으려면 자기 목소리를 들으면서 살아가야 한다.

자기 목소리를 들으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답니다. 자기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자기의 느낌, 판단,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니, “아니요” 하여야 할 때는 “아니요” 하며, “예”라고 대답해야 할 때에는 “예”라고 하는 것이랍니다.

자기 주체성을 갖지 못하는 이들은 우유부단하고 자기 삶을 다른 이의 판단에 의지해서 살아가니, 자기 의견보다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옮기어 “내 친구 아무개가 그렇게 말 했어요”  지위가 높은 "누구가 그랬어요.” “그런 것 같아요” 등 객관적인 것에 의지하는 언어문화가 바로 이런 확고한 철학이나 주관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있다는 것이지요.

자기 주체성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 목소리가 없기에 “아니요”를 할 줄도, 갈등을 두려워하여 거절할 줄도 모르는 체 좋은 게 좋은 것이란 식으로 타협하면서 살려하니, 이런 사람들이 누리는 평안은 참 평화가 아니라 노예적인 평안이라서 겉으로는 잔잔한 것처럼 보이나 마음속은 여러 가지 병적 증상들을 갖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확고한 철학이 서 있지 아니하거나, 자기 주장없이 남의 말을 옮기는 우유부단성에 실망하고 분노하면서 생겨난 부정적인 감정들은, 스스로 자학에 빠지거나 다른 엉뚱한 생리적 긴장으로 나타나 머리가 아프고, 소화가 안 되고, 구토가 나고 잠이 오지 않는 다는 것이지요.

저의 경우, 지난 시절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착한 사람으로서, 착한 만큼이나 줏대가 없이 얼마나 자주 “아니요” 할 때에 “예”라고 대답하고 나서, 자신을 혐오하고 단죄했는지 부끄럽습니다.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착하게 살기 위해서 보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믿는 종교는 자유인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 착한 사람으로 만들려 하지 않지요.

“착한 이들을 만들려는 종교는 사람을 나쁘게 만들지만, 자유로움으로 초대하는 종교는 사람들을 착하게 만든다. 그것은 자유로움이 사람을 악마로 만드는 내적 갈등을 다 부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필자는 더 이상 착한 사람이 되어 살려 애쓰지 않고, 내 주체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살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이제는 ‘죽일 놈’ 소리를 듣지 않는 한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하면서 살아가렵니다.

원하지 않는 부탁을 누가 해 왔을 때 차마 ‘아니요‘라고 응답하지 못할 경우 그 부탁에 응답하고 나서 후회할 것이 분명할 경우,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자는 것이지요.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나를 싫어하는 사람과 정말로 계속 인연을 맺어도 좋은가? ‘

웨인 다이어는 “친구란 당신이 스스로 선택한 지금의 당신 이외 다른 인간이 되라고 주장하는 그런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강요하는 그는 적어도 당신에게 기생충이나 마찬가지다. 기생충은 먹여주지 않으면 당신을 싫어한다.” 했습니다.

또 “이것은 나의 인생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시간은 한정되어있다. 그 누구도 나를 소유할 수 없다. 누가 나를 사랑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기 바란다. 당신의 뜻대로 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사랑해주지 않는 것이 좋다.”

※ 사소한 상처에서 헤어나려면 그림자 투사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림자란 우리가 의식하기를 거부하면서 무의식 상태에 내버려 둔 우리의 어두운 면입니다. 다른 말로 그림자란 우리 의식이 빛을 향하고 있을 때, 그 뒤에 드리워지는 무의식의 어둠이라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인간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은 우리 무의식 안에 있는 그림자가 투사되면서 생긴 것이라는데, 그 누군가가 이런 것들을 들추어낸다면 우리는 크게 화를 내고 분노한다는 것이지요. (자기 약점이나 흉이니까요)

  쉽게 말하면, 살아가면서 주는 것도 없이 미운 사람이 있고, 왠지 모르게 그 사람이 싫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지요. 아무 이유도 없이 그 사람이 싫고, 보기만 해도 화가 난다면, 평소에 내가 의식하고 있지 않던, 어쩌면 외면하고 있었던 열등한 세계들이 자꾸 노출되어서, 성질이 나는 것이랍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격렬하게 화를 내고 이유도 없이 상대를 죽도록 미워한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림자가 투사되어서 그런 것이니, 어떤 사람이 무슨 짓을 하던 내 마음에 안 들고 나를 짜증나게 한다면, 내가 미워하는 것은 실상 그가 아니라 내 그림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들 사이에서 많이 보와 온 말 같지요?)
    
누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내가 지나치게 반응한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상대의 자극적인 말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림자가 건드려 지면서 반응하는 것은 아닌지 보아야 할 것이랍니다.


내 의식 뒷면의 그림자를 건드리는 사람은 나와 비슷한 사람일 것이고, 어떤 모임에서 그 모임의 중심인물이 되려하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싫어졌다면, 아마도 내가 그런 사람일 것이라는 것이지요. 내가 중심인물이 되려하고 말을 많이 하고파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밉게 본 그 사람과 나는, 서로 비슷한 그림자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들을 비판하기보다 나에게 그러한 비판적 심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보도록 하라고 권고하렵니다.

자석은 동류끼리는 서로 화합하지 못하여 ‘+’가 ‘+’를 만나면 저항하고 밀쳐내며, ‘-’가 ‘-’를 만나면 강하게 저항하고 밀쳐낸다. 강한 사람이 강한 사람을 만나면 서로 밀쳐내고, 잘난 사람이 잘난 사람을 만나면 밀쳐내고, 거룩한 사람이 거룩한 사람을 만나면 밀쳐냅니다.

서로 비슷한 그림자를 갖는 사이에서는, 상대가 나에게 내가 상대에게 위협적 인물로서 평가되고 경험되어 진다. 그러니 그림자 투시에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내 안의 그림자를 긍정적으로 전환시키려면 그 그림자에게 의식의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한답니다. 그림자를 직면하면서 의식할 때, 그림자는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닌 것이지요.

숨을 크게 들이키고, 마음을 넓게 가지라는 것이겠지요. 그게 어디 쉬운가요?

상대를 바라보면서 내 관점으로 보는 것 보다 한 걸음만 떨어져서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는 것이였습니다. 나 위주에서 상대의 처지와 기분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보자는 것입니다.


듀엣베베 복음성가 1집 - 17곡

https://youtu.be/o3ZaNY8Xlf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