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5주간 (루카10,25-37)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고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손발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은 향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말로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할 때입니다(1요한 3,18).
덕을 높이 쌓으려고 애쓰는 한 젊은이가 산골짜기에 있는 고승을 찾아가서 “스님, 이 고통스럽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참 지혜를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스님께서 “나쁜 일은 하지 않고 좋은 일만 하는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스님, 그것은 세살박이 어린 아이도 다 아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스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세살박이 어린 아이도 다 아는 것이지만 여든 노인도 다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나쁜 일은 멈추고 좋은 일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실천하기는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해야 한다.’ ‘용서해야 한다.’,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는 것은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겻은 사랑의 열매는 손발에서 완성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자비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그것을 사는 것은 다릅니다. 야고보 사도의 서간을 빌려 이야기 한다면(2.14-17 참조) ‘실천없는 자비는 죽은 것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영적 물질적 어려움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만나기 위한 지속적인 활동이 자비를 살아있도록 만듭니다. 자비는 보기 위해서 눈을 가지고 있고, 듣기 위해 귀를 가졌으며 일으켜 세워 주기위해서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7,21).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함으로써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아는 바를 행동으로 옮겨야 하겠습니다. 실천하되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는 율법교사의 물음에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되묻습니다. 그러자 율법교사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이 말씀 안에는 "보아하니 율법서를 배우고 가르치는 데는 정통해 있으면서 그 내용을 실천하는 일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구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분명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릅니다. 행함으로써 아는 것이 확인됩니다.
이어 율법교사는 자기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에 한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길을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 사람을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놓고 가버렸습니다. 마침 길을 가던 한 사제가 그 사람을 보았으나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레위인도 그를 보고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사제는 누구입니까?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레위인들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제를 돕는 일을 도맡아보던 사람으로 하느님과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레위인은 상태를 확인하고도 그냥 지나쳤으니 더 비정합니다. 사제나 레위인은 아마도 숨어있는 강도들에게 자신도 그렇게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경신례를 담당하는 이로써 부정을 타지 않을까? 오히려 강도로 오해 받지 않을까? 이런저런 핑계를 내세워 어려운 처지에 빠져있는 이웃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일을 거절하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을 도와주어도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 사람의 후광으로 내가 빛나지도 않으니 도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의 반대말은 무엇인지 아시죠? "무관심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요한의 첫째편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1요한 4,18).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강도 맞은 사람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 주고는 여관으로 데려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튿날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그를 간호해 달라고 부탁까지 하고 떠나갔습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누굽니까? 당시 사제나 레위인등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마리아인을 사람취급도 안 하였습니다. 율법을 지키지도 않으며 부정하게 살아간다고, 구원에서 제외된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여겼고 마주치는 것조차 꺼려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를 돌봤습니다.
누가 강도 맞은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당연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묻자, 율법교사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루가10,37)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대답 안에는 아직도 사마리아인을 입에 담기 싫어하는 마음이 배여 있는 것입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 입니다.’ 하고 대답해야 했습니다. 자기가 못한 것을 대신 행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다행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의 대답을 듣고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풀어라!”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말로나 혀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결국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율법교사처럼(이웃이 누구입니까?) 나 중심으로 생각하여 내게 이웃이 된 사람만을 돕겠다고 작정하면 도와주어야 할 사람을 고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족, 동족, 인연을 맺은 사람 등 도와주어야 할 사람, 돕지 않아도 될 사람, 돕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구별하면 이웃사랑에 선뜻 뛰어드는 일을 주저하게 됩니다. 사실 여러 모임을 다녀 보면 거기 모인 분들의 성향을 보게 됩니다. 거기에서 색깔이 드러납니다. 많은 경우에 교육수준이나 여러 가지 환경이 비슷한 사람들과만 이웃으로 지내고 싶어 합니다. 그야말로 끼리끼리입니다. 그 생각은 율법교사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도를 만난 사람의 처지에서 이웃이 되겠다고 마음먹으면 이웃의 개념에 한계를 둘 수가 없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자기를 도와주겠다고 나타난 사람을 거절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혹여 "내가 이대로 죽으면 죽었지 네 도움을 받기 싫다"고 원수의 도움을 거절할 기력이 남아 있다면 그는 아직 절박한 처지가 아닙니다.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웃이란 아무런 이득도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어떤 처지와 상황 안에서도 서로 돕고 살아가는 관계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는 이웃의 한계가 없습니다. 사마리아인처럼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온갖 위험과 오해를 무릅쓰고 또 갖가지 차별과 장벽을 넘어서서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때와 그런 곳에서 피어납니다.
사제와 레위인에게는 강도를 만난 사람이 외면하고 지나가도 될 ‘남’이었습니다. 사랑에 관해 많은 말을 해온 그들이 정작 사랑을 증명해야 할 순간에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입으로 선포된 사랑이 위선과 거짓으로 판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에게는 결코 그가 ‘남’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행할 수 있는 모두를 행했고, 줄 수 있는 전부를 주었습니다. 물질뿐 아니라 희생과 헌신으로 사랑의 마음을 모두 다 주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사랑은 말보다 행함에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주는 사랑이 진실한 것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의 이웃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으로 한정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복이지만 누구에게나 좋은 이웃이 되어 주기를 작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을 소리 높여 외쳐도 이웃을 형제로 여기지 못한다면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스쳐 지나간 사람, 사마리아 사람의 시선이 어디 있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나의 이웃이 누구냐?’를 묻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자신의 삶에 안주한 상태에서 '이웃이 누구인가?'를 찾지 말고 고통받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내가 그의 이웃이 되어주려고 노력하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그 안에서 반드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열 가지를 아는 것에 만족하기보다 알고 있는 한 가지를 실천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깨달았으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에 옮겨야 마땅합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루카10,37).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의 구체적 실천을 통하여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몸소 당신의 모두를 내어줌으로써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셨고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해 오늘도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3,18)해야 합니다. 환자방문이나 봉사활동, 재능기부 등 이웃을 향한 마음이 활짝 열리기를 희망합니다. “행동은 입보다 크게 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행동이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이웃을 향한 구체적 사랑의 표현을 확실히 하는 하루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무엇인지 아시죠?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데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말까 망설이지 말고 민첩하게, 후회없이 하시기 바랍니다. 1독서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30,11.14).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하는 거짓말은
1. 어머니 벌써 가시게요? 며칠 더 계시다 가세요.
2. 용돈 적게 드려 죄송합니다. 다음에 많이 드릴께요.
3. 어머니께서 하신 음식이 제일 맛있어요.
4. 전화 드렸는데 안 계시더군요.
5. 저도 나중에 어머님 같은 시어머니 될래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하는 거짓말은
1. 아가야, 나는 너를 딸처럼 생각한단다.
2. 생일상은 뭘?
3. 내가 얼른 죽어야지.
4. 내가 며느리 땐 그보다 더한 것도 했다.
서로의 다른 마음은 어쩔 수 없어도 하느님 안에서 하나되도록…..
죽기 전 가장 많이 하는 후회
1. 난 내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했고 따라서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대신 내 주위사람들이 원하는 (그들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살았다.
2. 그렇게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다. 일 좀 덜할걸.
대신 가족과 시간을 더 많이 보냈어야 했다. 어느 날 돌아보니 애들을 이미 다 커버렸고 배우자와의 관계조차 서먹해졌다.
3. 내 감정을 주위에 솔직하게 표현하며 살지 못했다
내 속을 터놓을 용기가 없어서 순간순간의 감정을 꾹꾹 누르며 살다 정 신이 이상해지기까지 했다. 감정에 충실할걸.
4. 친구들과 연락하며 살았어야 했다
다들 죽기 전 얘기하더라고 한다. "친구 ㅇㅇ를 한번 봤으면.."
5. 행복은 결국 내 선택 이였었다.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는데 겁이나 변화를 선택하지 못했고, 튀면 안 된다고 생각해 남들과 똑같은 일상을 반복했다. 내 기준에 충실 하지 못하고 남 눈치를 보면서 남의 인생을 살았다. 남에게 잘 보이지 말고 내가 행복해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청주 교구 청주성모병원장)
오늘을 위한 기도/김소엽 작사, 장욱조 작곡
/바리톤 유성은 & photo by 김순용
',·´″```°³о♣마음의 쉼터↘ > 강론·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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