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친구처럼 느껴라
늙어가는 일은 시간과 관련한 특별한 경험이다. 살다 보면 손가락 사이로 시간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살날이 점점 줄어든다고 느낀다. 그래서 유한하고 제한된 시간의 경험은 두려움을 동반하다. 그러면 나에게 남은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주어진 시간에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럴수록 시간은 내게서 더 멀리 달아나고, 더 빨라지고,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내가 싸워 이겨야 할 적이 되어 있다. 그리스인들은 시간의 경험을 신화에 담아 표현했다.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시간의 비밀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왕위를 빼앗기는 것이 두려워 자기 자식들을 다 먹어버린 크로노스에 대한이야기가 나온다. 크로노스의 부인 레아는 남편을 속이기에 이른다 제우스가 태어나자 아기 포대기 속에 커다란 돌덩이를 넣어놓은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돌덩이를 먹어버린 크로노스는 이로 인해 제우스에게 제압을 당하게 된다. 시간측정기를 크로노미터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바로 언제나 부족하고, 틈만 나면 우리를 잡아먹으려 드는, 우리가 적으로 경험하는 시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어에는 시간을 가리키는 낱말이 하나 더 있다. 기회, 가능성으로서의 시간을 의미하는 편안한 느낌의 '카이로스'가 그것이다. 카이로스는 선물로 주어진,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뜻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이 크로노스인지 카이로스인지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온전하게 순간을 사는 사람의 시간은 선물로 주어진 편안한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붙잡을 수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우리에게 속해 있다. 이것이 바로 카이로스 시간의 비밀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느낄 수 있고 함께 숨 쉴 수 있다. 이로서 우리는 시간에 대한 감각을 터득한다. 잘 늙고 싶은 사람은 시간에 대한 관계를 한번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시간을 음미하고 그 순간 속에 온전히 존재할 수만있다면 시간은 줄어들지 않는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지도 않는다. 그리고 매 순간 새로운 선물로 주어진다. 그러면 시간 속에 온전히 존재할 때 시간은 영원이 된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시간이 멈춘다는 것은 지루해서 시간이 정체된 것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시간의 존재를 강렬하게 느낀다는 뜻이다. 그러면 시간 속에서 영원을 만질 수도 있다. 삶이 충만해지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을 적이 아니라 친구로 대하는 것이 진정한 노년의 기술이기도 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에 대한 명상에서 "내게는 한 방울의 시간도 소중하다"라고 썼다. 그리고 구약성서에 나오는 현자 코렐렛은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코헬렛3:1 고 했다. 노년을 사는 사람은 시간의 비밀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궁극에는 나의 시간이 신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신만이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사람은 시간 속에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따금씩 시간의 장막을 뚫고 조물주의 영원성이 내리비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노년의 기술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김진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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