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7주일
'용서하여라'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고 사랑은 기적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고, 사랑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사랑은 대단합니다. 사랑은 장난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그리고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요한)
‘사랑하면 보게 되고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면 모든 것이 선하게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많이 사랑하면 많이 행할 수 있고 사랑하면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배은망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그 큰 사랑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왜 그리 좁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숨을 거두실 때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23,46)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하시며 먼저 당신을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구하셨습니다. 스테파노도 역시 그랬습니다. “주님,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사도7,60).
스테파노는 주님이 사신 그 사랑을 죽기까지 살았습니다. 주님이 용서하신 것처럼 스테파노도 용서하였습니다. 이 용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우리 모두가 반드시 얻어야 할 구원은 바로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하느님의 용서가 없으면 우리가 무슨 선행, 무슨 공로로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용서는 사랑의 고귀한 표현입니다. 용서는 우리사회가 인간다운 사회가 되기 위하여 꼭 필요합니다. 각박한 사회, 미움과 분열의 골이 깊어가는 이 시대에 용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지역, 계층간, 부모 자식간, 부부간, 형제간등 상처난 곳곳에 이해와 양보의 덕이 필요하고 그 뿌리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용서는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까지도 내어 주셨습니다. 아드님은 당신을 낮추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내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버리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용서하는 사랑, 내어놓는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주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닮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국물이 뜨거울 땐 국물 속의 기름이 잘 나타나지 않듯이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편의 단점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물이 식을 땐 국물 속의 기름이 떠오르듯이 사랑이 식을 땐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변함없는 사랑이 그립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왕, 다윗을 생각해 봅니다.
다윗은 사울의 시기 질투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여 창을 이용하여 죽이려고 하였지만 두 번이나 몸을 피할 수 있었고,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으므로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울은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을 이용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사위로 삼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점점 더 다윗을 두려워하게 되어 평생 그와 원수가 되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로 작정하지만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을 무척 좋아하였기 때문에 다윗을 감싸주고 다윗이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그러던 어느날 사울이 동굴 안에서 뒤를 보고 있었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역전의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겉옷 자락을 자른 후에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인 나의 주군에게 손을 대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아니시냐?”(1사무24,7) 다윗은 사울을 살려 주었습니다
이 사연을 안 사울은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 내가 너를 나쁘게 대하였는데도, 너는 나를 좋게 대하였으니 말이다. 주님께서 나를 네 손에 넘겨 주셨는데도 너는 나를 죽이지 않았으니 네가 얼마나 나에게 잘해 주었는지 오늘 보여준 것이다. 누가 자기 원수를 찾아 놓고 무사히 제 갈 길로 돌려보내겠느냐? ..이제야 나는 너야말로 반드시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손에서 일어설 것이다.”(1사무24,19-21)
그래놓고 다시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뽑은 부하 삼천명을 데리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진지 한가운데에서 자고, 그의 주변에는 군사들이 야영하고 있었습니다. 역으로 사울이 죽을 수 있는 처지가 되었지만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머리 맡에 있는 창과 물병을 가지고 나오게 하였습니다. 결국 사울은 다윗에게 “내가 잘못했다”고 선언합니다. 다시는 해를 끼치지 않겠다. 내가 정말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고 고백합니다. 사울은 자기의 시기 질투, 욕심을 버리지 못하였고 다윗은 끝까지 원수를 사랑하였습니다.
우리도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하였던 이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하셨으니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입기바랍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줄 뜻을 품으십시오.”(로마12,17)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콜로3,13)“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3,9)
오래 전의 일입니다. 한 성당에 성령기도회 강의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한 부인이 저에게 와서는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남편이 위암으로 고통 받고 있는데 가족들이 매일 함께 기도합니다. 그러던 중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나의 특사를 보내준다”하셨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 저의 성당에 오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하느님의 특사이십니다.” 저의 남편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처음에는 사양하였지만 아주 간절히 말씀하셔서 더 이상 뿌리치지 못하고 다음날 아침 미사를 봉헌한 다음 성체를 모시고 그 댁을 방문하였습니다. 기도상을 잘 마련해 놓고 기도하셨는데 십자가 밑에는 “주 하느님, 저를 어루만져 주소서. 마음의 상처를 고쳐 주소서. 저를 붙들어 주시어 성한 몸이 되게 하여 주소서. 저는 주님 한 분 만을 기다립니다.”라는 글을 써 붙여놓았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참 기가 막혔습니다. 남편은 그야말로 개차반으로 살았습니다. 술과 여자, 험한 세상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병이 들었습니다. 결국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으니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비로운 것은 그런 남편이 미운 것이 아니라 측은해 보이고 불쌍해 보였습니다. 원수같던 마음은 다 사라지고 그 왜 진작 더 큰 사랑을 주지 못했을까? 사랑으로 품었으면 저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집을 찾아들어온 것이 감사하고 고마웠습니다. 못 다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하니 기뻤습니다. 그야말로 탕자가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 때문에 가정으로 향했고 가정은 그 모든 것을 품었습니다.
열심히 기도한 덕택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살았기에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는 마음이 살아난 것입니다.
고해성사, 병자성사를 베풀고 성체를 모셔드렸습니다. 3일째 되는 날 감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특사가 기도하였는데 그는 벌떡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성한 몸이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의 상처를 고쳐준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부부간, 부자간 화해와 용서를 이루고 하느님을 차지하였으니 그것이 성한 몸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와서 하느님께 돌아가는 인생여정 안에 마지막을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혹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이 있다면 더 많이 사랑해 주지 못했음을 용서 청하고 자비를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미움과 증오, 시기질투의 마음을 버리고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십시오.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권성일 (미카엘) 생활 복음 성가 28곡
',·´″```°³о♣마음의 쉼터↘ > 강론·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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